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문단 편집) === 출생 ~ 청년기 === 모한다스[* '다스'(Das)는 '[[하인|종]]'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한다스'(Mohandas)는 '모한의 종', '[[크리슈나]]의 종'이라는 뜻이다.] 카람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구자라트]]의 작은 소국인 포르반다르 국(Porbandar State)에서 카람찬드 간디와 파트리바이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는 포르반다르 국의 수상이었다. 간디 가문의 종교는 [[비슈누]]를 섬기는 종파인 바이시나바였고, 특히 어머니가 대단히 독실했다. 간디의 삶의 지침서였다고 하는 《[[바가바드 기타]]》도 바이시나바의 경전이다. 그렇지만 집안에서는 [[자이나교]], [[이슬람교]] 신자들과도 많은 교분을 맺었다. 간디의 카스트는 평민인 [[바이샤]]였다. 모한다스 간디는 어린 시절을 포르반다르에서 보내다가 간디가 7세 쯤에 아버지가 라자스타니크의 가신(家臣)이 되면서 라지코트로 이사했고, 거기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인도는 초등학교 5년에 중학교 과정 없이 고등학교가 6년이었다. 학교 생활 중이던 1883년 13세의 나이로 마칸지 가문의 카스투르바이(कस्तूरबा)와 결혼했다. 《간디 자서전》에 따르면 자신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모범적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간디의 어린 시절 일탈을 적어보면 친구의 권유로 고기를 먹었던 일이 있었다.고기의 경우, 식욕보다는 호기심과 당시 인도에 퍼져있었던 [[개혁]] 문화, 즉 인도의 카스트나 힌두교 악습같은 비합리적인 문화를 없애고 서양식(주로 영국식)의 합리적인 문화를 수용하자는 움직임이 퍼져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영국인처럼 육식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가져온 염소고기를 시작으로 한 1년쯤 먹다가 어느날 문득 고기의 맛을 즐기고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자신을 깨달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외의 일탈로는 아내와 싸운 뒤 매춘을 하려다 실패했던 일도 있었다고 쓰고 있고, 12세 때는 담배를 사려고 하인의 돈을 훔친 적도 있었으며, 15세 때는 형이 가지고 있었던 금팔찌의 조각을 훔쳤던 일도 있었다고 쓰고 있다. 이후 아버지에게 용서받고 그 일을 그만뒀다고 쓰고 있다. 그 외에도 자살 시도도 한 번 있었다고 한다. (출처 모한다스 간디, 《간디 자서전》, 1부 4장) 이렇게 성장하던 중 간디가 16세이던 1885년,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가 사망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망은 모한다스 간디에게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오는데 당시 간디가 밤중에 아내와 성관계를 갖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정확히 말하자면, 간디는 평소 노환에 걸린 아버지의 팔다리를 잠자리에 들기 전 성심성의껏 주무르며 안마를 했다. 그런데 그 날따라 10분쯤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간디의 아버지가 "피곤할 텐데 그만하면 되었구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간디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당시 신혼이던 아내와 성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그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간디는 금욕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 때 아내는 임신중이었는데 이 아이는 태어난지 4일 만에 사망해버렸다. 대부분의 위인 전기에서는 [[성관계|그것]]을 말하기 껄끄러웠던지, 그냥 졸려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밤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급사하여 슬퍼한 것처럼 순화(?)시켰다. 이후 간디는 1887년 11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바우나가르 주의 사말다스 대학교(Samaldas College)에 입학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냈다가 방학중에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브지 다베(Mavji Dave)[* 간디는 '조시지'라고 불렀다.]가 자기 아들인 케발람 다베가 있었던 영국으로의 유학을 조언하게 되었다. 때마침 사말다스 대학교에서 성적과 흥미를 잃었던 모한다스는 반대하던 어머니를 설득해 술과 육식, 불륜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영국 유학을 허락받아 8월 10일 당시의 봄베이로 떠난다. ('뭄바이'는 1995년에 바꾼 이름). 간디는 1개월간 봄베이에 머물렀는데, 이 때 간디가 속한 모드 바니아(Modh Bania) [[카스트]]의 '셰드'(카스트의 우두머리)에게 소환을 당했고, 여기서 설득을 빙자한 협박을 들었지만 간디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또한 많은 힌두인들이 믿고 있었던 >'바다(Kala Pani, black water)를 건너면 카스트 계급을 잃는다.' 는 금기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1888년 9월 4일, 간디는 인도 봄베이를 떠난 뒤 9월 말 영국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 도착하게 되었다. 본래 군인이 되길 원하여 19세가 되던 1887년, 영국에 의한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참전하기 위하여 자진 입대했으나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입대하지 못하게 되었다.전염성 폐렴으로 귀향 조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888년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에서 공부를 한 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황을 다룬 기록들을 보면 간디는 영국 생활에 진심으로 빠져들어서 한 때는 어느 영국인 여성과의 결혼까지 생각했다가 그만두기도 했고, 바이올린 연주나 무도회 같은 영국 상류층들의 생활에도 능숙해질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